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이라는 곳이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낯선 곳이지만 이공계에서는 선망의 직장이자 안정적인 정규직을 제공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자금도 많다. 1년에 정부가 연구개발로 쓰는 돈이 30조 가까이 되는 데 이중 3분의 1을 여기에서 쓴다. 못해도 10조 넘는 돈이 쓰이는 기관이다.
출연연에 대한 평가는 처참하다. 출연연의 위기라는 말은 10년 전에도, 지금도 있다. 민간이라면 진작에 청산되었어야 할 기관들이 고도성장을 견인했다는 과거의 영광과 정부기관이라 없애기 어려운 현실이 10년 동안 단골 비판의 대상이 되는 신기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코로나 위기에서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가석방을 허용한 이유도 반도체와 백신이었다. 바꿔말하면 국가 위기에서 정부는 백신 확보에 무능함을 자인하고 일개 기업에 그 역할을 맡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신은 연구개발 이후 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맡아야 할 출연연 또한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출연연의 문제점을 굳이 여기서 다시 들추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 지적에 대해 출연연 구성원들은 늘 일어나는 일이니 넘기자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니 만큼 의욕도 떨어지고 잘해봤자 칭찬도 못 듣는다는 패배의식만 높아진다.
그 반대급부로 의무를 이행해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최대한 가지겠다는 부작용만 나타나고 있다. 가짜 학회에 등록해 해외여행을 빙자한 학회 참석이나 연구비 유용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런 현상의 근간은 출연연의 역할 상실에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기업도, 대학도 제 역할을 못하던 경제성장기 초기, 대통령보다 높은 월급을 받는 과학자를 만들고 과학입국의 신화를 만들었던 출연연이다. 아무도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 역할이 무엇인지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민간의 영역이 월등히 커졌다. 민간이 못하는 것을 선제적으로 해야 되지 않나 정도의 인식은 출연연에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민간이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면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시장성이 없어서 민간이 하지 않는 것을 출연연에서 한다면 이는 자원의 낭비일 뿐이다.
출연연의 역할을 좀더 크게 잡아야 한다. 쉽게 생각하자. 국가의 돈이 들어가서 연구하는 기관이니 국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가의 문제는 국가의 경쟁력과 국부의 창출과 연결된다. 이 두 가지를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주 탐사와 개발, 무기의 개발과 같이 출연연만이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역할은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민간 영역을 만들어지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정말 돈이 많이 들지만 과학 경쟁력 제고를 위해 필요한 기초연구 또한 출연연의 몫이다. 입자가속기나 천문연구, DNA 유전자 기초 연구 등 대학 단위에서 어려운 것들도 출연연의 몫이라 할 수 있다.
남는 것은 국부 창출을 위한 기초연구하는 것이다. 학술적인 의미의 기초연구가 아닌, 단초를 제공하는 연구를 말하는 것이다.
국부창출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이미 시장은 형성되었지만 수입에 의존해 국부가 새어나가는 분야를 대체하는 것이다. 흔히 소부장이라고 하는 소재, 부품, 장비가 대표적인 분야이다.
좀 더 확장한다면 제약의 근간을 이루는 물질 분리나 분석 등도 해당된다. 한약이라면 녹용, 사향 등 고가로 수입되지만 대체가 안 되는 것을 연구해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다.
다른 하나는 수요가 확인되는 데 기술적인 한계로 시장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분야들이다.
예를 들어 매실 같은 경우 국내에서 충분한 양이 생산되고 건강에도 좋다는 효용이 알려져 있지만 복용의 어려움, 데이터를 통한 증명 문제 등으로 인해 시장이 정체되어 있다.
대기업에서는 시장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들지 않고 있고 중소기업은 자금력과 연구능력 부족으로 필요성을 알면서도 손을 못 대고 있는 분야들이 있다. 이 분야에서 출연연이 활약해야 한다.
이에 맞춰 평가 체계도 바꿔야 한다. 출연연의 구성원들은 연구자의 자율을 높여달라고 한다. 자율을 높이면 좋은 연구결과는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논리다.
국민의 혈세를 받으면서 이런 주장을 천연덕스럽게 아직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람을 시켜 집안의 벽지를 바꿀 때도 자기 취향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거나 도배사 마음대로 하는 것 같으면 컴플레인이 나오는 시대이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연구 스폰서가 엄연히 존재하는 데 그 돈 받고 마음대로 하다보면 언젠가 좋은 것이 나올 거라는 논리가 언론에 실릴 때마다 세상 혼자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연구의 자율성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부창출이라는 목표에 부합한다면 고려할 부분이다. 국가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여러가지 요소들은 전문가 집단의 합의를 통해 도출이 용이할 것이다.
국부창출은 시장분석이 필수다. 그동안 대부분의 정부 연구과제에서는 연구 도입부에 요식적으로 시장규모가 얼마고 이게 잘되면 좋다는 식의 내용을 넣어서 넘어갔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 기술이 개발되면 기술이 원료에서 제품까지 만들어지면서 얼마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것인지 최대한 정확하게 추계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건강기능식품 원료를 만들었다고 하면 원료 가격에서 시작해 최종 산물인 제품 가격의 차이에서 생산 원가를 제하면 그만큼 부가가치가 증가한 것이고 국부가 증가한 것이다. GDP 산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연구자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연구 과제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 버겁고 관심이 없다면 정말 기초 학문적인 연구를 하고 논문으로 평가받으면 된다. 해당 분야가 논문이 없다면 발표할 논문 편수로 평가받고, 이미 논문이 많다면 논문의 파급력으로 평가받으면 된다.
기초보다는 기술개발을 하고 시장에 진입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은 연구자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구역량과 시장의 초기 수요를 맞춰서 가능성을 계산한 후에 얼마의 국부를 늘릴 수 있을 것인지 잡고 연구를 진행하면 된다. 기술이전의 로열티뿐만 아니라 없던 시장이 생기거나 작았던 시장의 크기가 커진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분야의 평가를 가치도 없는 특허의 갯수와 얼마되지도 않는 기술료로 평가하고 있다.
출연연은 기업처럼 매출을 내는 곳도 아니고, 대학처럼 논문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다.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다. 돈을 벌려면 기업을 가고 남을 가르치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부의 창출이 출연연에 주어진 큰 과제이고,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굳이 자율을 외치지 않아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국민의 지지와 함께 자율이 주어질 것이다.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한 때 출연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지금은 출연연을 운영하는 세금을 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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