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의 탕전은 기존 서적에서는 생각보다는 상세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상한론의 계지탕이 약을 끓이고 복용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적었고, 다른 처방들도 이에 준한다고 하나 지금은 한의원 또는 원외탕전에서 탕전을 해서 포장을 해서 복용하는 시대이다.
적어도 옹기 약탕기에 물 얼마를 넣고 얼마를 빼고 하는 식의 방법만으로는 지금의 약 조제 환경에 적합한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것이다.
첩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기존 의서의 용량은 모두 1첩을 기준으로 한다. 첩지에 싸서 보관했다가 처방한다는 개념인데, 원래는 환자의 몸상태에 따라 그때그때 2-3일 분량의 약을 조제해서 복용시킨 후 약량을 조절하여 다시 투여하는 개념이었다.
첩지도 양반이나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지 궁궐의 왕들은 약방에서 바로 계량해서 끓인 약을 복용했다. 6-70년대에서는 대학 한방병원에서도 첩지로 처방을 해줬고, 첩지 모양이 잘 잡히도록 향부자를 많이 처방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던 것이 보약의 개념이 확산되고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복용하는 형태로 복약 방식이 바뀌면서 약은 그램수로 계산하면서도 복용 횟수는 1첩당 몇 회를 얼마 동안 먹어야 하는지 역으로 계산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탕전 시간과 물의 양, 방법에서도 비슷한 듯 다른 방법들이 논의된다. 대표적인 것이 물의 양이다. 제약회사 등에서 한약의 표준 추출법을 보면 약재 양의 10배 가까이 물을 넣어서 열수추출을 한 후 각종 검사를 진행한다.
한마디로 탕전은 약 처방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심도 있게 논의된 내용이 적다. 물론 일반 물과 알코올 추출 시의 성분 차이나 동물실험 차원에서 효능이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연구는 일부 처방에 한해 진행되기는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통적인 의학서적에서 물로 추출하라고 했느냐 아니면 물과 술을 섞어서 추출하라 했느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방법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탕전방법이 중요한 이유는 이 자체가 제형의 개발과도 연관되어 있고 한의학 발전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80년대만 해도 한약은 첩지로 받아와서 집에서 고생스럽게 옹기 약탕기로 달여서 그때그때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정용 약탕기가 등장하면서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더 이상 고생스럽게 불 앞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약의 소비도 크게 늘어났다.
또 한번 변화가 있었던 것은 한의원의 탕전기 도입이다. 집에서 신경 써서 한약을 끓였던 것을 한의원에서 깔끔하게 포장을 해서 집으로 보내주니 데워서 먹기만 하면 되었고 이 또한 한약 수요를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수요 견인보다도 처방자의 의도대로 한약의 효능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같은 십전대보탕도 원외탕전마다 다르게 나온다. 현재는 처방자의 책임하에 그 차이를 관리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의사들 사이에서 공감을 하는 탕전법이 있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그렇다면 탕전은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할까? 탕전은 약재를 그냥 먹는 것보다 흡수를 좋게 하고 독성이나 부작용을 줄이는 데 있다. 100도씨 가열을 통해 세균과 바이러스를 사멸시키고 수용성이나 용매에 따라서는 지용성 물질까지 추출해 복용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성분 자체를 그대로 추출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예전에 많이 사용한 압력식 추출기가 좋다. 수율도 높고 전탕시간도 짧다. 문제는 뿌리줄기가 많은 한약의 특성상 전분이 많이 우러나서 유효물질의 비율이 줄어들고 소화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는 무압력식, 순환식의 탕전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통적인 옹기탕전도 무압력이었던 것을 보면 적절한 것으로 보이나 탕약 증기의 순환은 의도치 않은 방향성 물질까지 계속 탕약에 남게 하는 것이라 어디까지 날리고 어디까지는 탕약에 보존을 할지 연구가 필요하다.
한때 증류한약이 인기를 끌기도 하였고, 임증지남의안 등에도 금은화로 등 특정 약재의 증류 성분을 처방하는 사례가 있으나 이는 전체 탕약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 특정 약재에만 활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탕전시 물의 양을 정하는 기준도 다양하다. 탕전기마다 다르지만 증발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물의 양의 최소량은 다음과 같은 식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물의 양(ml)=약재량(g)*3+팩당약량(ml)*팩수
최소량이라고 한 이유는 위의 물량을 넣었을 때 탕전기 안에서 약재 주머니가 물에 충분히 잠겨야 하며, 이 때문에 물의 양이 더 추가로 들어갈 수 있다. 필요한 약의 양보다 더 많은 양이 추출될 수 있지만 약재가 골고루 추출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경험상 15일분을 추출하고 남는 약이 1리터 이내면 약효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의 양만큼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약재를 넣는 부직포 주머니를 묶는 방법이다.
탕전은 큰 주전자에 차를 우리는 것과 같다. 약재 주머니를 티백이라고 본다면 주머니 안에 약재를 넣고도 여유가 있어야 잘 우러나며, 이 때문에 약재 주머니는 들어간 약재가 적다고 해서 바짝 묶을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입구에 가깝게 묶어서 약재가 잘 섞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약재 계량을 할 때부터 부직포에 약재를 넣은 후 처음 넣은 약재가 위로 보이도록 섞는 과정을 넣어주는 것이 좋다. 약맛이 부드러워지는 효과도 있고 무엇보다도 골고루 전탕이 되고 추출이 된다.
약재를 물에 넣고 바로 끓이기 시작하는 것보다 일정 시간 불린 후 탕전을 해야 한다. 필자는 약재 1kg를 기준으로 50분을 물에서 불리고 1시간 50분을 탕전 한다. 그 이하는 40분을 불리고 1시간 40분 탕전, 약재 1.2kg가 넘어가면 1시간 불리고 2시간 탕전을 한다. 탕전기의 예약기능을 사용한다.
약재에 물이 충분히 흡수되어야 전탕 효율이 좋고 맛도 부드러워진다. 성분도 골고루 추출된다.
요즘은 거의 없어졌지만 전탕 하고 남은 약재를 다시 모아 끓이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 약재가 귀하던 시절의 방법이지 지금처럼 약효를 온전히 쓰는 것이 중요한 시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녹용의 탕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분분하다. 녹용이라는 약재 자체가 탕전에 적합하지는 않다. 동의보감에서는 녹용이 들어간 처방의 90% 이상이 환으로 되어 있다. 녹용 보약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고민으로 보인다.
필자는 녹용은 분쇄한 후 다른 약재의 양과 상관없이 1시간 불리고 2시간 탕전을 하고 있다. 분쇄 여부는 약효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손으로 분질러서 넣을 필요는 있다.
참고로 덩어리가 손가락 1마디 넘어가거나 껍질이 있는 씨앗이나 열매 약재들은 분쇄 또는 적어도 칼집을 내서 탕전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분쇄를 너무 많이 하면 안 된다. 약액이 탁해지며 심한 경우 콜로이드의 형태로 추출은 되지 않고 약액 속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대추는 칼집을 내거나 미리 잘라놓은 것을 쓰고 산조인은 약을 계량하면서 분쇄해서 넣는다.
첩수는 동의보감의 재탕을 기준으로 20첩 30팩이다. 아침과 점심에 각 1첩으로 약을 끓인 후 남은 약찌꺼끼를 다시 탕전해서 저녁에 먹기 때문에 나온 계산이다. 자동차보험 처방은 2첩이 하루 처방량이다.
필자는 20첩 30팩을 15일 동안 먹도록 한다. 아침저녁 하루 2번 공복에 복용시키며 양약은 식후, 한약은 식전으로 구분 지어 복약 지도를 한다.
한때 첩수 개념 없이 15일분에 약재 총량으로 처방한 적도 있으나 기존 체계 자체가 첩당 기준인지라 15일분 20첩으로 고정시키고 약재의 양이나 팩수를 조절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같은 약이라도 제형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탕전 방법론은 제형 논의의 일부이다.
정제, 연조제, 캡슐제 등 양약이 주로 쓰는 제형에 대한 시도는 1차적으로 끝났다. 결론적으로 대부분 한약에 적합하지 않다. 소량의 활성물질과 대량의 부형제가 위주인 양약에 비해 한약은 아무리 수분을 제거해도 약량이 적지가 않다. 연조제의 발견은 의미가 있다. 액체인 탕약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 장내 세균도 수용성 섬유질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약은 수용성 섬유질뿐만 아니라 각종 항산화, 항염증, 항암 물질의 집합이다. 물로 추출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효과가 좋은 추출법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물(또는 다른 액체)로 추출하는 방법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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